제주시 화북일동 골목에서 만나는 조선시대 공동체의 기록 화북비석거리 탐방
제주시 화북일동의 골목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다 보면, 돌담 사이로 크고 작은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있는 풍경이 나타납니다. 그곳이 바로 ‘화북비석거리’였습니다. 바람이 조용히 불고, 얇은 구름이 햇살을 부드럽게 걸러내던 오후였습니다. 돌담 위로 고개를 내민 비석들은 제각기 다른 크기와 색을 지니고 있었고, 그 표면에는 오래된 글씨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거리는 조선시대부터 마을의 공덕비와 선정비, 그리고 신앙비가 함께 모여 세워진 곳으로, 제주의 공동체 정신을 상징하는 국가유산입니다. 세월의 흔적이 깃든 돌들은 하나의 기록이자, 마을 사람들의 기억을 품은 조용한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1. 마을 길 끝에서 만난 시간의 골목
화북비석거리는 제주시 화북일동 해안로 근처, 화북포구 뒤편의 작은 마을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에 ‘화북비석거리’를 입력하면 마을회관 인근 골목으로 안내되며, 주차 후 도보로 2분만 걸으면 돌비들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좁은 길을 따라 들어서면 바닷바람이 살짝 스쳐 지나가고, 돌담 너머로 귤나무와 민가 지붕이 이어집니다. 길의 한쪽 벽면에 돌비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으며, 각 비석마다 이름과 연대가 다릅니다. 일부는 글씨가 바래 알아보기 어렵지만, 그 표면의 질감에서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바람 속에서도 이곳만큼은 묘한 정적이 흘렀습니다. 도시의 중심에 있지만, 시간은 이 골목에서만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2. 서로 다른 사연을 품은 돌비의 배열
화북비석거리에는 20기 이상의 비석이 일렬로 세워져 있습니다. 형태는 사각형, 타원형, 그리고 뾰족한 머리 형태 등 다양하며, 재질은 대부분 제주 현무암입니다. 비석마다 새겨진 내용은 마을 유지나 관직자의 선정을 기리는 ‘선정비’, 학문과 덕을 기린 ‘공덕비’, 그리고 마을의 수호를 기원한 ‘당비’로 구분됩니다. 돌 표면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게 새겨져 글자가 닳은 곳도 많았지만, 일부 비석에는 여전히 또렷한 필체가 남아 있습니다. 특히 중앙의 가장 오래된 비석에는 ‘숙종 15년’이라는 연호가 새겨져 있어, 17세기 후반의 기록임을 알려줍니다. 돌의 질감은 거칠었지만 그 안의 의미는 섬세했습니다. 각각의 돌이 사람들의 기억을 품고 서 있는 듯했습니다.
3. 제주의 공동체가 남긴 기록
이 거리는 단순한 비석의 모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함께 세워온 역사 그 자체입니다. 조선시대부터 화북은 제주의 해상 교통과 행정의 중심지 중 하나였고, 주민들은 관아나 향교의 유지, 공로자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웠습니다. 안내문에는 “화북비석거리는 제주의 유교적 전통과 공동체 신앙이 공존한 상징적 장소”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실제로 마을 어르신들은 지금도 정월대보름 무렵이면 이곳에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린다고 합니다. 비석 앞에 서면, 단순한 돌덩이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신뢰가 돌이 되어 세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 시대의 정신이 바람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4. 보존 상태와 거리의 분위기
화북비석거리는 비교적 원형이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일부 비석은 세월의 영향으로 표면이 마모되었지만, 전체적인 배열과 형태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지자체와 주민들이 함께 관리하며, 주변에는 잡초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비석 아래에는 돌 받침이 놓여 있고, 바닥은 작은 자갈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오후 햇살이 비석 사이를 비출 때, 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조용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새들이 전깃줄 위에서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고,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부드럽게 비석 사이를 스쳐갑니다. 복원된 것이 아닌, 살아 있는 마을 속의 유산이라는 점이 이곳만의 특별함이었습니다. 오래된 것의 고요한 품격이 느껴졌습니다.
5. 인근 명소와 함께 즐기는 역사 산책
비석거리를 둘러본 뒤에는 인근의 ‘별도연대’와 ‘화북진지’를 함께 방문하면 좋습니다. 두 곳 모두 화북 해안을 지켜온 역사적 유적지로, 이 거리와 함께 제주의 방어와 문화의 이면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도보 10분 거리에는 ‘화북포구’가 있어 바다 풍경을 감상하기에도 좋습니다. 포구 앞의 작은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바람에 흔들리는 파도와 돌담을 바라보는 시간은 여유로웠습니다. 점심은 근처의 ‘화북해안식당’에서 고등어회정식을 추천합니다. 짭조름한 바다의 맛이 돌비의 묵직함과 묘하게 어울렸습니다. 역사와 일상이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는 마을의 분위기 속에서, 제주의 삶이 한 폭의 이야기처럼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6. 관람 팁과 현장에서의 감상
화북비석거리는 아침 일찍 혹은 해질 무렵에 방문하면 좋습니다. 빛의 각도에 따라 비석의 그림자가 뚜렷해지고, 글자가 더 잘 보입니다. 비석에 직접 손을 대거나 문질러서는 안 되며,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람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조용히 걷다 보면 바람이 돌비를 스치는 소리와 함께, 돌 위에 앉은 작은 새의 울음이 들려옵니다. 그 소리가 마치 오래전 제사를 올리던 사람들의 목소리처럼 느껴졌습니다. 바다 냄새와 돌의 냉기가 섞인 공기 속에서, 시간이 단단히 굳어 있는 듯했습니다. 잠시 멈춰 서서 한 비석 앞에 시선을 두면, 제주의 역사가 돌의 표면을 따라 천천히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무리
화북비석거리는 제주의 기억이 돌에 새겨진 길이었습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그 안에는 마을을 지키고 사람을 기리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석양빛이 돌비를 비추며 하나하나를 금빛으로 물들이는 순간, 과거의 이야기들이 다시 살아나는 듯했습니다. 바람이 돌담을 스치며 부드럽게 울리고, 그 속에서 세월이 말을 건네는 것 같았습니다. 이곳은 단순한 비석의 모음이 아니라, 제주의 삶과 정신이 쌓여 만들어진 살아 있는 역사였습니다. 조용히 걸음을 옮기며, 그 돌들 사이로 스며든 사람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화북비석거리는 지금도 묵묵히, 제주의 시간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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